허정찬 기자
‘수사반장’의 정의로운 형사반장이자 ‘전원일기’의 인자한 김 회장, 그리고 14년간 전국의 밥상을 지켰던 ‘국민 아버지’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30일 방송계에 따르면 고인은 전날 오후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2011년부터 14년간 진행을 맡아온 KBS 1TV ‘한국인의 밥상’에서 하차했다. 이후 재활에 힘써왔으나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며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1939년(호적상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 중앙고와 서라벌예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1959년 극단 실험극회에서 연극 ‘햄릿’으로 데뷔해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했다.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특채 탤런트로 브라운관에 진출한 그는 20대부터 노역을 자처했다. 스물일곱 살에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노년의 김종서 역을 맡아 주목받았으며, 30대에 50대 형사를, 40대에 60대 노인을 연기하며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을 다졌다.
고인은 한국 방송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두 대표작으로 반세기 넘게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8년간 방영된 MBC 수사극의 효시 ‘수사반장’(1971~1989)의 ‘박 반장(박영한)’ 역으로 정의로운 경찰의 표상이 되었고, 22년간 방영된 MBC 대표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1980~2002)에서는 양촌리 ‘김 회장’ 역을 맡아 따뜻하고 인자한 한국적 아버지 상을 완성했다. 이후 MBC ‘그대 그리고 나’(1997~1998)의 ‘캡틴 박’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크린에서도 ‘만종’(1970), ‘영자의 전성시대’(1975), ‘바람불어 좋은날’(1980),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굵직한 한국 영화 명작에 출연하며 60여 년간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아울렀다. 고개를 젖히고 내뱉는 특유의 ‘파하~’ 웃음소리는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그의 친근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단편 유머집 ‘최불암 시리즈’가 출간될 정도로 대중과 가깝게 호흡했다.
“브라운관에서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고인의 연기 철학은 삶으로도 이어졌다. ‘수사반장’ 연기를 위해 실제 경찰 간부와 새벽 현장을 누볐고, 이 인연으로 1972년 최초 명예 경찰에 위촉된 뒤 2024년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에 올랐다.
‘전원일기’에서 입양아 ‘금동이’를 가족으로 맞이하는 연기를 한 뒤에는 실제 취약계층 아동 후원에 뛰어들었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장 등을 맡아 장기 후원을 이어왔으며, 2012년에는 사단법인 ‘제로캠프’를 설립해 소년 수형자들과 위기 청소년 교화를 위한 연극·뮤지컬 교육을 진행하는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 비례대표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제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치를 당장 포기하는 건 정도가 아니다”라면서도 다시는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고 1996년 ‘전원일기’로 본업에 복귀했다.
복귀 후에는 시사교양 진행자로 대중과 소통했다. KBS ‘좋은나라 운동본부’(1999~2008)를 이끌며 담배를 끊는 솔선수범을 보였고, 2011년부터는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을 통해 14년간 방방곡곡의 음식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기록했다.
2014년 드라마 ‘기분 좋은 날’을 끝으로 “후배들에게 지적도 받아야 하는데 나이 때문에 다들 어려워해 발전이 없다고 느꼈다”며 은퇴가 아닌 ‘자연스러운 물러남’을 선언했다. 이후 2024년 MBC ‘수사반장 1958’에 특별 출연하며 대중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고인은 백상예술대상 TV·연극 부문 최우수연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국민훈장 목련장(1998), 은관문화훈장(2014) 등을 수훈했다.
유족으로는 동료 배우이자 아내인 김민자 씨와 아들 동녘, 딸 동비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