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찬 기자
48개국 체제로 확대된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32강 진출마저 실패한 한국 축구는 끝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기형적인 마무리로 4년의 여정을 마쳤다. 성의 없는 사퇴 쇼와 변명을 남기고 퇴장한 홍명보 감독, 그리고 그 뒤에 숨어버린 대한축구협회(KFA)가 합작한 대참사다.

29일 자정을 넘긴 시간 발표된 홍명보 감독의 사퇴 입장문은 사과를 빙자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다. 홍 감독은 “모든 판단이 늘 옳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모든 판단의 기준만큼은 언제나 한국 축구였다”고 강변했다.
언뜻 군더더기 없는 사과처럼 보이지만, 이는 명백한 변명이자 궤변이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정말 한국 축구였다면, 남아공전에서 지고 있을 때 수비수 한 명을 빼고 공격수를 투입하는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남아공전의 무기력한 수비 전술이 그의 최선이었다면, 애초에 본인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지휘봉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진정 '한국 축구'를 위하는 길이었다. 두 번이나 월드컵 사령탑을 맡아 이런 전술적 퇴보를 보여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헌신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그는 짧은 입장문을 빠르게 읽은 뒤, 취재진의 질문도 받지 않고 마치 후련하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퇴장했다. 최악의 성적을 거둔 이유를 설명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귀국 후 공식적인 해단식이나 대국민 사과 자리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축구협회는 사퇴하는 홍 감독의 등 뒤로 비겁하게 숨어버렸다.
한국은 체코와의 1차전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며 천운이 따르는 듯했다. 하지만 멕시코와의 2차전(0-1 패)에 이어, 비기기만 해도 진출이 유력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3차전에서 0-1로 패하며 조 3위(1승 2패, 승점 3, 골득실 1)로 추락했다.
남아공전에서는 상대 주전 미드필더 2명이 결장했음에도 최고 공격수 손흥민을 선발 제외했고,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과감한 전진 대신 의미 없이 후방에서 공만 돌리는 '플랜 A(스리백)'만을 고집했다.
자력 진출에 실패한 한국은 다른 조의 결과에 명운을 거는 '경우의 수'에 놓였다. 26일 경기 전까지 한국의 32강 진출 확률은 87.6%에 달했다. 하지만 26일과 27일 5가지 경우의 수가 연이어 빗나갔고, 결정적으로 28일 오전 콩고민주공화국이 우즈베키스탄을 3-1로 꺾고 K조 3위(승점 4)로 올라서면서 한국의 남은 희망마저 완전히 소멸됐다. J조 최종전 결과와 상관없이 12개 조 3위 팀 중 상위 8위 안에 들지 못하게 되면서 탈락의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선수단의 면면을 보면 아쉬움은 배가된다.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등 유럽 무대를 호령하는 역대급 '황금세대'를 구축하고도 모래알 조직력을 노출했다.
그라운드 위에서 상대 수비수 3~4명에게 에워싸인 동료를 돕기 위해 접근하는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벤치로 물러나는 선수들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등 감독의 통제력은 상실된 지 오래였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시절의 '형님 리더십'은 온데간데없었고, 과도한 비판에 팬들과 각을 세운 일부 선수들의 성숙하지 못한 처신도 아쉬움을 남겼다.
홍 감독은 마지막까지 "대한민국 축구를 향한 마음까지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라고 포장했지만, 현실은 한국 축구를 수십 년 후퇴시켰을 뿐이다.
이번 월드컵 참사는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 경질 이후, 특정 학맥과 밀실 행정 논란 속에 홍 감독을 졸속으로 선임한 축구협회의 예견된 패착이다. 감독 선임 절차부터 대표팀 운영, 본선 준비, 위기 관리까지 축구협회의 행정력은 완전히 붕괴됐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월드컵 직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고 홍 감독도 사퇴했지만, 단지 수장들의 얼굴만 바꾸는 꼬리 자르기식 사퇴 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축구협회의 전면적인 인적 쇄신과 뼈를 깎는 시스템 개혁 없이는, 세계 축구의 변방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축구에 내일은 없다.